쪽방촌에 ''마법천사'' 뜨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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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돈의동의 '쪽방촌'. 3~4층짜리 건물 90개 동에 3.3㎡(1평) 안팎의 쪽방 771개가 다닥다닥 들어서 있는 전형적인 서민 동네다.
23일 오후 쓰레기 더미와 폐지, 리어카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이곳의 한 골목에서 술에 취한 40대 남자 2명이 말싸움을 벌였다. 서로 밀치며 고성이 오갈 즈음, 골목에 접한 한 쪽방집에서 이상근(45)씨가 나와 싸움을 말렸다.
"왜 대낮부터 이래요.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빨리 집에 들어가서 쉬도록 합시다."
이씨는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쪽방촌에서 알아주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정신과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도 수도 없이 들락거렸다.
그런 그가 요즘 동네 사람들로부터 "전혀 딴 사람이 됐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씨도 "예전 같으면 대낮에 술에 취해 싸움질하는 저 사람들 사이에 내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무엇이 이씨를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을까. '스스로 돕는 자를 찾는 마법천사'(이하 마법천사)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쪽방촌의 극빈층 지원 프로그램의 결과다.
◆'마법천사'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종로1~4가 동사무소가 지난 10월부터 진행하고 있는 '마법천사' 운동은 정부가 기초생활수급자에게 매달 지원하는 38만7000원 외에, 후원자들의 기부금으로 30만원을 추가로 주는 자립 지원 프로그램이다. 정부의 복지 지원은 대상자 누구에게나 돈과 현물을 주지만, 마법천사는 생활에 긍정적인 변화를 보인 사람에게만 돈을 주는 '결과 보상식' 지원을 한다. 주민들의 기부로 진행되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 프로그램인 것이다.
'마법천사' 운동을 처음 생각해낸 사람은 지난 4월 부임한 사회복지사인 박현숙 주민생활지원팀 주임. 그는 생계비를 지원하더라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 빈민층의 모습을 두고 고민했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동사무소로 찾아와 "돈을 달라"고 고함을 지르거나, 성질이 난다고 주먹을 휘둘러 상담자 책상 유리를 깨는 사람이 많았다. 바지를 입은 채 그대로 오줌을 누는 사람도 있었다.
박 주임은 "빈민층에게 무조건 시혜를 베푸는 것은 가난을 구제하기는커녕 그들의 기본적인 삶에 대한 의지마저 꺾는 경우가 있다"며 "생활을 개선하면 더 많은 보상이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게 '마법천사' 운동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기부금을 모으는 게 급선무였다. 통장이나 반장 등 지역 대표들을 모아 '마법천사 운동' 설명회를 열고, 주변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후원을 부탁했다. "매일 술 처먹고 싸움질이나 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왜 도와야 하느냐"는 사람들에게 "그런 생활을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되도록 돕자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지금까지 모두 4명이 '마법천사'가 되겠다고 나서 3800여만원의 후원금을 내놓았다. 인사동에서 무역업체를 운영하는 유동현씨는 한꺼번에 3600만원을 쾌척했다. 유씨는 "변화한 사람들에게만 지원금을 준다는 설명을 듣고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후원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1년 동안 10명의 쪽방촌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종로4가에서 10년째 구두닦이를 하고 있는 김태범(48)씨도 "나도 어렸을 때 고생도 하고 배도 많이 곯았다"며 "어려운 사람, 특히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한다"며 80만원을 내놓았다.
◆'30만원'과 '관심'에 바뀐 인생
석 달이 지난 지금, '스스로 돕는 자'로 인정돼 매달 30만원씩'마법천사'의 지원을 받은 이는 4명이다. 동사무소가 준 '미션'을 3개월 이상 완수한 이들이다. 이상근씨는 하루 10병 가량 마시던 소주를 하루 2잔 이내로 줄였다. 3개월 동안 싸움을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변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스스로 폐쇄 병동에 입원해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기까지 했다. 이씨는 "다들 나한테 '술 먹지 말라'는 소리만 했지 내가 힘들다는 걸 이해해 준 사람은 없었는데 박현숙 주임은 달랐다"며 "'내가 다시 넘어져도 이해해주겠구나'는 생각이 들어 폐쇄병동에 내 발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30만원이라는 돈보다 관심이 더 큰 변화의 동력이었던 것이다.
최정업(54)씨도 '3개월 이상 술에 취해 싸움을 하지 않으면 30만원을 준다'는 약속을 지켜 '스스로 돕는 자'로 뽑혔다. 그도 3개월 전에는 술에 취해서 동사무소 기물을 부수고 행인에게 시비를 걸어 수시로 구치소를 들락거렸던 사람이다. 요즘엔 동사무소 한쪽 구석 책상에서 주민들에게 보내는 편지 봉투에 주소를 적어 넣는 봉사활동을 할 정도로 변했다.
집에 틀어박혀 극도로 고립된 생활을 했던 에이즈 환자인 신모(36)씨는 '남들과 어울리고 자주 웃기'라는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를 받아 마법천사의 도움을 받고 있다.
최정업씨는 "내 어려움을 다른 사람이 이해해주고 귀 기울여 준다고 생각하니 나도 뭔가 그 사람에게 믿음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내 의지를 갖고 잘 살려고 노력하고 더 이상 사람들한테 욕 안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점이 가장 기쁘다"고 말했다.
[박세미 기자 runa@chosun.com]
[박순찬 기자 ideach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