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에겐 인권도 없나…대포통장 막겠다고 ‘대출 불가자’ |
[기사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8180007145&code=950201 |
ㆍ서울시, ‘빈자 블랙리스트’ 인격·재산권 침해 논란
서울시가 노숙자·쪽방 거주자 명의로 개설되는 대포통장·대포폰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이들을 ‘금융권 대출불가자’로 등록키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행정기관이 노숙자·쪽방 거주자란 이유로 재산권을 제약하는 것은 특정 계층에 대한 인격권과 재산권 침해이며 실효성도 없다는 지적이다.
17일 서울시에 따르면 시내 거주 중인 8000여명의 노숙자·부랑인·쪽방촌 거주자 등을 ‘금융권 대출불가자’로 등록할 수 있는 ‘노숙인 등 저소득 취약계층을 위한 명의도용 피해 예방대책’을 추진 중이다.
대출불가자로 등록되면 금융권 대출불가는 물론 이들 명의로 사업자나 차량 등록을 할 수 없게 된다. 등록자가 추후에 신청 철회를 요구할 경우에도 서울시가 자활의지를 심사하거나 심지어 경찰에 조사를 의뢰할 수 있는 등 인권 침해 소지도 많다. 특히 대출불가자 관리를 개인신용평가기관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명단 유출 우려도 있다.
서울시 자활사업팀 관계자는 “대출불가자로 등록되더라도 입·출금은 가능하고 통장(1계좌)도 개설할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또 희망자에 한해 신청서를 받고, 등록기관을 은행연합회가 아닌 개인신용평가기관을 통해 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노숙자 등은 행정기관이 나서서 자신들의 재산권을 제재한다는 것은 경제적 인권 침해라는 반응이다. 노숙자 박모씨(58)는 “불법행위에 가담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한 데도 서울시가 쪽방촌에 거주하고 노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대상으로 전체의 정상적인 금융거래까지 묶겠다는 발상이 기가 막히다”며 “범죄예방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은 대출도 받지 못하고 모두 죽으라는 얘기냐”라고 말했다.
서울 전농동에서 가나안 노숙인쉼터를 운영하고 있는 김수재 목사는 “대포통장이 심각한 사회 문제라 하더라도 이를 막기 위해 개인의 금융권을 아예 봉쇄해버리겠다는 건 문제가 있는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김 목사는 또 “노숙인들은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걸 매우 싫어하는데 자발적으로 하라고 하면 누가 ‘내가 대출불가자요’하며 신청 하겠냐”며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남기철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번 제도는 일반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게 아니라 노숙인 등 특정 계층만 겨냥해 금융정보를 조회하겠다는 것이라면 문제”라며 “대출불가자 등록은 노숙인들에게 금융능력이 없다는 일종의 징표로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시는 이와 관련,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에 사업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 검토 요청을 했다. 김형완 인권위 인권정책과장은 “노숙인들의 명의를 관리하거나 보관하는 과정에서 시가 특별한 기준이나 법령 등 제도적 방침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혜리기자 grace@kyunghyang.com>